구미이야기(23) 서울이 못 된 선산
구미아이티뉴스
기자 / gmitnews@hanmail.net
입력 : 2015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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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落東江)으로 흐르는 감천(甘川) 강변(江邊)의 선산(善山) 앞들 가운데 괭이를 거꾸로 세운 듯한 동산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곳은 늙은 잡목(雜木)이 검은 바위 사이로 숲을 이루어 아담한 풍치를 보여준다. 산으로 보기엔 아담하고 자연적(自然的)으로 생겼다면 그 모습이 너무나 기이(奇異)하여 이 동산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神泌)로운 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 옛날 임금이 서울을 옮길 것을 계획(計劃)하여 나라가 태평(太平)하고 국민(國民)이 평안(平安)할 수 있는 왕도의 터를 찾아 금수강산(錦繡姜山) 곳곳을 아무도 모르게 순행 다니시다가 선산읍(善山邑)에 당도하였다.
선산(善山)의 산천(山川)을 돌아보니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곳보다 왕도(王都)로서 가장 적합한 곳이다. 북서(北西)쪽으론 병풍 같은 자연(自然)의 산성(山城)이 둘러 있어 적(敵)의 침입(侵入)을 막을 수 있고, 東으로 낙동강(洛東江), 南(남)으론 감천(甘川)의 두 강이 있어 또한 적(敵)을 방어(防禦)하기에 좋으며, 하늘에 우뚝 솟은 금오산(金烏山), 냉산, 갈미봉은 먼 곳의 적의 형편을 살필 수 있는 봉화대(烽火臺)로서 천연(天然)의 요새지(要塞地)이다.
또한 넓고 기름진 들판은 도성내(都城內)에 거주하는 관리(官吏)와 국민(國民)의 식량(食糧)을 충분(充分)히 댈 수 있는 곡창지대이니 이 모두 하늘이 내린 서울자리라고 마음 속으로 결정하고 임금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고을은 장차 현명한 제상(帝相)과 훌륭한 장군(將軍)과 더불어 영웅달사(英雄達士)가 많이 나올 성(聖)스러운 곳이 듯도 하였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첫째 조건인 산골을 일일이 세어 보았더니 백 골짜기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아흔 아홉 골이라 왕도(王都)로서 첫째 조건이 미비한 것이다.
"아깝고 원통하구나"
무릎을 치고 애석해하며 그 자리에 주저 않은 왕(王)은
"골짜기 하나가 부족하다고 해서 왕도(王都)가 못되다니"
하고 크게 낙심하는 것이다. 선산(善山)땅을 서울로 정하지 못한 애석감(愛惜感)을 이기지 못하여 왕(王)은 이틀을 이곳에 더 머물다가 또 다시 도읍터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읍내 로상리(路上里) 산 밑에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농민이 살고 있었다. 그는 육십 고개를 2, 3년(年) 앞둔 늙은이었는데, 그에겐 나이 열아홉 살과 열일곱 살 되는 두 딸이 있었다.
아들도 없는 그 늙은이는 수년 전부터 맏딸이 혼처(婚處)를 백방(白方)으로 구하였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시집갈 나이 지난 맏딸은 때때로 짜증을 내고 투정을 하며 늙은 부모의 간장을 태우곤 하였다. 그런데 노부부는 둘째 딸을 혼인(婚姻)시켜 자식 대신 데릴사위나 맞아 여생을 의지할까 하고 서로 약속한 듯 마음먹고 있었다.
두 처녀는 눈이 오고 몹시 추운 긴 겨울을 늘 어두운 방안에서 우울하게 지내오다가 만물이 소생하는 봄철이 옴과 동시에 싹이 트는 풀과 나무같이 봄기운의 충동인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설레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언니! 오늘은 어쩐지 내 가슴이 울렁거리며 숨이 가쁘다. 날씨도 따뜻하고 하니 들나물도 캘겸 앞들에 나가 놀다 올까 응?"
동생은 언니에게 졸랐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머니께서 아신다면 다 큰 처녀들이 들에 마구 다닌다고 야단이 날 것이다. 꾸중들을 짓을 아예 그만 두는 것이 좋아"
언니가 쏘아 붙이니,
"아버지는 뒷 산골에 팥밭 갈러 가셨고 어머니는 빨래하려 가셨으니 돌아오시기 전에 우리 둘이 들 구경 갔다가 먼저 돌아와서 모른 체 하면 될 것 아냐, 언니들 구경 가"
동생은 또 한번 조른다. 과년한 언니도 춘정은 아우만 못지 않아 마음속으로는 몹시 가고 싶던 참이었다.
삼월 열 아흐렛날이라면 봄 향기가 무르익어가는 계절이다. 말 같은 두 처녀는 드디어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앞들을 향해 나선 것이다. 3월 19일에 꽃다운 나이의 처녀 자매가 길을 떠난 것이다.
"언니, 나는 구실냉이 달냉이랑 많이 캐서 쌀뜨물에 따끈히 국을 끓여서 어머니가 빨래 갔다 오면 드릴테야, 봄나물 국은 보약보다 더 좋대나"
재치 있는 동생은 앞으로 나가면서 나물을 캔다.
"봐라 얘야 난 쓴냉이 뿌리랑 모메 뿌리랑 캐어 삶아 무쳐서 아빠가 팥밭 갈고 오시면 반찬으로 드려야지. 모메 뿌리는 동삼보다 더 좋단다"
나이든 언니의 말이다.
두 처녀는 이 논둑 저 밭골로 나물을 캐면서 가다가 어느덧 감천 가의 백사장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의논이나 한 듯이 나물 바구니를 옆에 놓고 걸어온 길을 돌아 보면서 나란히 앉았다. 삼단같이 땋은 머리채를 뒷 등으로 휙 넘기면서 '후유'하고 이마에 어린 땀을 소맷자락으로 닦는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며 무르익어 가는 봄날의 정경은 한 폭의 그림만 같았다. 멀리 병풍처럼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노상리는 복숭아와 살구꽃 속에 잠겼고, 듬성듬성 서 있는 단계(丹係)방천의 버드나무도 연녹색으로 봄빛이 완연하다. 역말(驛村-花鳥里)의 동산 늙은 소나무는 오늘따라 유달리 푸른 듯하고, 성황당(城隍堂)은 산그늘에 덮여서 알 수 없는데 죽자리 5층탑은 새터고개가 가로막고 방향만을 분간할 뿐이다.
"언니 우리 집 어디쯤 있노? 응"
동생이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그것도 몰라 등신 바보야? 보나마나 노상리 제일 막바지 별남이 집이지 뭐꼬?"
퉁명스런 언니의 대답이다. 동생은 이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가졌던 호미로 무심히 땅만 그리고 있다.
맑은 감천 물 역시 말없이 백사장을 흐르고 강건너 부래산(浮來山)은 앞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저편 물목(凰山里)동네의 오고 가는 사람과 마우(馬牛)뿐이다. 언니는 무슨 불만이나 있는 듯이 굳센 팔에 힘을 주며 자기도 모르게 호미로 자꾸만 앞을 찍고 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모래밭은 푸른 하늘과 맑은 강물과 어울려 유난히 흰빛을 자랑하고 물 건너 부래산 마루 끝엔 낚이는지 낚이지 않는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낚시하는 늙은이의 무심한 표정이 고요 속으로 저물어지고 있다. 강 건너 실버들은 봄의 홍취를 못 이기는 양 봄바람에 나부끼고 요란한 종달새는 다사로운 이 봄을 하늘 높이 찬미하는 듯 하며, 멀리서 소를 타고 한가히 논길을 가는 목동의 보리 피리는 풍년가를 부르는 농부와 어울러 한 폭의 그림인양 하다.
어느것 하나 덧없이 깊어 가는 봄의 여신을 원망하며 흐르는 세월을 아끼지 않음이 없고, 나이든 처녀 총각들의 춘정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없다. 꽃을 찾아 바삐 날아다니는 쌍쌍나비는 청춘 남녀들의 화신인양 두 처녀의 눈 앞에 어른거려 그렇지 않아도 가슴에서 치솟는 춘정을 부채질하며 지나간다. 두 처녀는 미친 듯이 벌컥 일어나서 호랑나비를 잡으려고 쫓았으나 좀채로 잡히지를 않는다. 한참을 이러다가, 숨이 가쁜 이들을 쫓던 나비를 그만 두고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언니야 언니는 시집을 어디로 갈까? 내가 호미를 던저 맞춰 볼께, 응"
영리한 동생이 수작을 건다.
"남은 울분이 터질 지경이데 그 따위 말은 듣기도 싫어. 난 시집 안 갈테야 그 따위 말 말고 입 딱 다물어?"
눈을 흘기며 내뱉는 언니는 무뚝뚝한 대답이다.
"언니야 내말좀 들어봐 응, 요전날 밤에 엄마와 아빠가 둘이서 얘기하는걸 들었지 뭐야. 앞 집 김도령은 인물도 마음도 좋고, 농사도 많이 지어 좋다지만, 언니가 아무리 좋아한 대도 엄마 아빠가 그리론 언니를 안 보낸대"
"왜 안 보낸다더냐! 난 죽어도 가겠다. 왜 그럼 집에서 묶어두고 늙힐 작정인가? 머슴 삼아 부려먹기만 하고..."
"그게 아니라 김도령집은 잘 살아도 선채 돈도 작게 줄라하고 나락 한 섬도 주지 않을테니 그래서 뒷집 최도령을 사위로 삼는대."
"뒷 집 최도령에게는 죽어도 안 갈테야. 스물네살 이라는 게 키다리 장승같고 얼굴은 검붉고 어느새 수염이 꺼멓게, 거기다가 말더듬이라 속이 꽉 막히더라. 보기만 해도 지긋 지긋한 녀석한테 누가 시집갈까봐"
"언니는 아무리 그래도 안돼. 최도령을 사위로 삼으면 우리 집 일도 잘 해주고 선채 돈도 많이 받고 나락도 닷 섬이나 준다면서 우리 집은 잘 살아 나가게 된대 뭐? 뒷집 최 도령네 집하고 이미 말이 다 있었대"
"그래 그 녀석이 요전에 내가 샘에서 물을 이고 오니까 뒤따라오더니 히히 웃곤 내 머리 댕기를 잡아당기더라. 등신 병신과 같은 자식 꿈에도 보기 싫어. 정말 시집 안가고 도망가는 것이 더 좋을끼다"
"언니는 아무리 그래봐도 엄마 아빠는 앞 집 김도령한테는 시집 안 보낸대"
동생 말을 들은 언니는 흥분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더니 호미 자루를 내동댕이치면서,
"어제 저녁에도 앞 집 김도령하고 둘이 살짝 만났는데 아무도 모르게 둘이 손잡고 어디 로 가자 하더라. 얘야 내가 호미 자루를 던져 보고 네가 시집갈 데를 알아줄까?"
실망에 젖은 언니는 자기 사정을 잊은 듯 동생한테 이런 말까지 한다.
"흥, 난 싫어. 언니가 말 아니해도 나는 맘에 드는 총각이 있거든?"
수줍은 듯 나지막한 대답이다.
"너 아침마다 우리 집 앞으로 책을 옆에 끼고 글방에 다니는 강진사(康進士)댁 맏아들 말이지? 얘, 그 총각은 나도 맘에 슬며시 들더라. 길다랗게 땋아 느린 머리끝엔 깜둥갑사 댕기며 하얀 버선이랑 녹색 가죽신발은 더욱 사람의 간장을 녹이더라"
"아이, 말 마라. 부끄러워 집안도 좋고 논밭도 많고 일가도 많고 하니 말이다. 넌 예쁘지만 우리 집 같은 상놈 가난뱅이의 딸을 누가 며느리로 삼는대? 양반집안의 부잣집 딸들한테서도 많은 청혼이 있다는데. 참 그리고 명년 봄엔 서울로 과거보러 갈려고 열심히 공부한다더라."
"흥, 언니는 어째서 그렇게 잘 알고 있어."
"응, 나이가 열하고도 다섯 살 신랑감이 됐거든. 꼭, 장가 갈거야. 나하고 결혼하고 나서 과거에 급제하면 서울 양반이 되는 거야. 그럼 나는 서울댁....."
부끄러운 듯 홍조를 띄운 동생은 장래의 꿈에 가슴이 부풀었다.
"너 봐라,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데 강진사댁이 우리와 사돈한다든? 어림도 없는 말이야. 그만 둬, 요전날 밤에 엄마 아빠가 얘기하는걸 나는 자는 체하고 다 들었단 말이야. 우리 집은 아들이 없고, 엄마 아빠도 늙어셨으니, 너는 다른데 시집 보낼 수 없다면서 재 너머 외딴집 박첨지네 셋째 아들 삼돌이를 데릴사위로 삼는다더라."
"칫, 난 싫어"
동생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호미 자루를 잡는다.
언니도 호미 자루를 잡고 함께 모래 위를 이리저리 밭 갈 듯 무언가 그리고만 있었다. 두 처녀는 나물 캘 생각도, 집으로 돌아갈 마음도 없이 멍하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요란스런 종달새도 잠시 노래를 멈추었다. 읍내 쪽에서는 마을 아낙네들이 점심밥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나는 듯 이쪽으로 오는 것이 여기 저기 보인다.
바로 이때였다. 어디선가 우렁찬 음악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깨뜨리고 들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두 처녀는 본정신으로 돌아와서 귀를 기울이며 이 음악소리를 들었다.
천사(天使)들의 노래
先 唱 復 唱
선산이라 좋은고장 에이야 여엉차 영차 한골없는 백골이라 에이야 여엉차 영차 하느님이 선사하사 에이야 여엉차 영차 이동산을 보내신다 에이야 여엉차 영차 뒷골백골 수채워서 에이야 여엉차 영차 좋은왕터 되옵시고 에이야 여엉차 영차 시화연풍 국태민안 에이야 여엉차 영차 길이길이 번영하라 에이야 여엉차 영차
천사들의 노래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두 처녀는 문득 동시에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 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멀리 금오산 저편에서 뒷골 갈미봉까지 오색이 찬란한 쌍무지개 다리가 하늘 높이 놓여 있고, 수많은 어린 천사들이 산봉우리를 메고 이쪽을 향하여 두둥실 떠오르것이 아닌가? 얌전한 동생은 겁을 먹고 얼굴을 언니 치맛자락 속에 푹 파묻고 쥐죽은듯이 일어서서 두팔을 들고 고함을 지른다.
"아이고 동네 사람들 큰일났오. 산봉우리가 하늘 높이 떠오니 이 고장 사람들은 다죽었다 다죽었어!"
두 처녀는 혼비백산하여 바구니, 호미, 짚신을 그 자리에 둔 채 허둥지둥 맨발로 집까지 뛰어와서 방안에서 이불을 푹 덮어쓰고 죽은 듯이 숨어있었다. 이 광경을 본 어린 천사들은 발걸음을 멈추며 두 처녀의 행동이 요사스럽고 불길한 징조라 하여 메고 오던 산봉우리를 두 처녀의 놀던 자리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동시에 하늘에 먹장 같은 구름이 순식간에 모여 들더니 천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찬란하던 쌍무지개도 자취가 없어진 것은 물론이다. 다만 들 가운데에는 여태껏 없었던 한낱 동산이 자리잡고 있었을 뿐이다.
평화로운 고을 선산(善山)의 밤은 깊었다. 늦게 돋은 하현달이 수많은 별들의 속삭임을 비추어 주며 듣고 있었다. 첫닭 소리가 들리기 조금 전이었다. 웬일인지 먹물 같은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삽시간에 암흑세계로 변하여 우뢰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번개불은 세 번이나 번쩍이곤 하였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다.
정신을 차린 이 고장 사람들은 어젯밤에 일어났던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또 하나의 기적은 노상리 막바지에 있던 집과 두 처녀와 늙은 부모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일이다.
자료제공 : 구미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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