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이야기(13) 청백리의 표상, 신당 정붕
구미아이티뉴스
기자 / gmitnews@hanmail.net
입력 : 2015년 0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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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新黨) 정붕(鄭鵬, 1467~1512)은 해주인(海州人)으로 할아버지는 由이고, 아버지는 현감 철견(鐵堅)이며, 가학(家學)을 계승하였고,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영산군 10년(1504)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회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으며,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많은 사림파가 주살(誅殺)을 당할 때 현명하게 처신하여 몸을 보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교리에 복직되어 상경 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배들을 위해 학문을 가르치는 데 전심하였다.
신당은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일화들이 여러 가지 전하고 있다. 간신 유자광(柳子光)과는 외척간으로 문안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여종을 시켜 물건을 보냈는데, 여종이 갈 때 그의 팔을 끈으로 단단히 묶어 보냈다. 이는 여종으로 하여금 팔이 아파서 유자광의 집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함이었다.
하루는 숙직을 하고 집에 오니, 부인이 유자광의 집에서 쌀과 반찬을 얻어 와 밥을 지어 놓았다. 이 사실을 알고는 양식을 마련하지 못한 자신의 허물이라 하면서 친구에게 편지해 쌀을 마련하여 그 양만큼 유자광의 집에 도로 돌려보냈다.
귀양을 가게 되니 유자광이 독약을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못 돌아오게 되면 자살하라고 했다. 뒤에 풀려나서 이번에는 유자광이 귀양 가니 그 독약을 돌려주면서 "필요할 때가 있으리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도 있다. 강혼(姜渾)과 심순문(瀋順門)이 모두 기생을 데리고 있었는데, 정붕이 이 두 사람에게 빨리 기생을 버리라고 했다. 그런데 강혼은 곧 기생을 버렸고, 심순문은 기생을 버리지 않았다.
얼마 후 이 두 기생이 모두 궁중으로 뽑혀 들어가서 연산군의 총애를 입었다. 뒤에 기생을 버리지 않았던 심순문은 결국 그 기생으로 말미암아 죄에 말려 사형을 당했고, 사람들은 정붕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고 한다.
중종반정 후, 정붕에게 연산군 때 맡았던 교리를 다시 제수하니, 홍경주(洪景住)가 찬성(贊成) 지위에 있음을 알고는 부임하지 않고 사양했다. 그 후 절친한 친구인 좌의정 성희안의 천거로 청송부사(靑松府使)로 가서 잘 다스렸다.
이때 성희안이 서신을 보내어 "청송고을에는 응당 잣과 꿀이 많을 테니 조금만 나누어 보내 달라."고 하였다. 이것은 부사로서 청송의 잣과 꿀을 많이 거두어 먹고, 또 생기는 것도 많을 것으로 짐작하고 쓴 것이었다. 정붕이 답장하기를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을 백성 집의 꿀통 속에 있으니 부사가 어찌 이것을 구할 수 있으랴? "라고 하니 성희안은 크게 부끄러워하여 잘못을 크게 후회하면서 역시 신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자료제공 : 구미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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